발그미] 수원화성 답사 - II
용주사, 융릉/건릉을 보고는 수원화성으로 이동.
먼저 행궁 방문!!!
수원 화성의 행궁 입구 - 신풍루.
임금님의 행차시 거처하던 임시궁궐로 577칸이 되는 국내 최대의 규모였다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
봉수당. 화성행궁의 정당. 혜경궁의 회갑연 잔치를 이 건물에서 거행했다 한다.
봉수당 바로 앞에서... 오른편에 정조의 침소... 왼편에는 혜경궁의 침소였다 한다.
봉수당 중간에 일월오봉병과 임금님 자리가 보인다.
낙남헌. 일제강점기에 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 중 하나. 즉... 복원한 것이 아니라는.
백송. 어릴때는 모르는데 좀 지나야 몸의 껍질을 벗으며 잿빛이 된다 함.
이벤트 준비하는 궁녀, 무녀들....^^
자자... 수원화성 성곽 돌기다!!!
우리가 시작한 지점은 서남암문이다.
수원화성을 짓게 된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정조의 아비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을 수원화산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무덤에는 세가지가 있다 한다: 묘, 원, 능.
묘= 일반 무덤 (사대부)
원 = 왕의 어머니/아버지, 왕세자 등
능 - 왕릉. 왕비도 함께.
사도세자는 왕세자로 죽었다. 그런데 뒤주에서 명예롭지 않게 죽어서 처음에는 영조가 걍 "수은묘"라고 만들었다 한다. 디게 뒤끝 있는 아빠다 영조.... 그러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장헌세자로 추숭하여 "영우원"으로 한급 올려주심.
정조는 참혹한 아비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봐서 항상 그 슬픔과 한이 있었으리...
아니나 다를까 그가 왕위에 올라서 한 것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의 선포였다 한다. 정치적으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세력에 대한 엄포? 하여튼.... 그리고는 왕위 오른지 13년이 지나 자신의 아버지 무덤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꾼다.
어엿한 사춘기 소녀 심.준.보~~
이 사이에 등을 대면 바람이 솔솔~~이란다.
수줍게 웃는 인보...
장난 많은 인보. 좋다하는 준보.
성벽~~~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함. 복합성 축성이라고 하는데 화성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수원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 팔달산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수원.
서장대 - 장수가 장병들을 지휘하는 곳.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과학기자재 실험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인공강우기를 서장대 옆에대가 설치를 하고 계속 실험을 했는데 그 진동이 심하여 서장대가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94년에 고의적 방화가 일어났고 역시 2006년에 어느 청년이 카드빚 때문에 힘들어하다 불을 질러 사라지고도 했다.
서노대. 석궁을 쏠 수 있게 만든 곳.
반월형의 옹성이 이뿐 화서문.
수원화성에서 깃발을 유심히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가 있다.
동서남북, 색깔이 다른 깃발이 펄럭거린다.
적색(주작)= 남 , 흰색(백호)= 서, 파랑(청룡)= 동, 검정(현무)=북
노랑= 임금님 계신 곳
성곽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오니 행사들이 여기저기 진행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자랑하는 구간!!!~~
장안문. 서울을 향한 북문이다. 옹성한가운데 아치문이 나 있다.
장안문 올라가기!!~~ 우와 계단 가파름...
장안문에서 밖을 보기!~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아름다운 각루. 주변 경관도 뛰어난 곳. 옆으로 연못이 있어 참 이뿌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때는 공사중 ^^
동북각루. 복잡하게 연결된 팔각지붕들.
파란색 깃발이다!!!동쪽을 향하다!~
창룡문. 화서문의 살짝 축소판. 반월형 옹성.
이렇게 성벽에 공사감독, 석수, 인부등을 기재해놨다. 공사 실명제라나!
정조가 화성을 쌓으면서 낱낱이 그 공사과정을 기록하게 했는데 <화성성역의궤>라고 한다. 성벽을 쌓기 위해 사용했던 자재들, 일꾼들의 식량, 땔감 수레와 우마 등등을 포함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18세기말의 물품상황과 물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국가에서 시행되는 공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임금지불도 없이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한다. 화성 축성때는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임금이 인부들에 관심이 각별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한다. 그래서 전국에서 이 공사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이 내려지기도 했다 한다.
수원화성과 뗄 수 없는 것은 혜경궁 수원행차 및 회갑연인데 이에 대한 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화성의 진행과정과 준공된 원형, 행사일정과 행사내용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기록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성군 하나가 참 많은 것을 이뤄내었다는 생각.... 일찍 죽어서 안타깝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