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5. 22:07 piecE of WisdoM

보이스 피싱

수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오전에 있을 대장내시경을 위한 대장청소에 나섰다. 전날 밤에 약을 섭취해서 쫙 쏟아냈지만 병원 가기 전 새벽에도 한차례 쏟고 오라는 지령. 또 하라면 기여코 고대로 해야 하는 성미에 잠 쫓아가며 대장을 위한 물에 탄 달갑지 않은 약을 저어가며 비리다 못해 역한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럭셔리 건강검진을 받고 맨 나중에 수면 내시경을 하고 나오니 이건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오지를 않는다. 분명 말짱한 것 같은데 10분 전의 모든 기억은 붕붕 떠다닌다. 유령마냥 기억력도 집중력도 힘없이 서성거린다.
몽롱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절반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듯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서 집안 정리하고 있는데...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이건 아직도 수면중인지... 아님 이런날에 꿈결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지.

다급하게 누군가가 벨을 눌러댄다. 한번.... 두번세번..... 네번다섯여섯일곱...열.... 저 문 밖에도 정신이 절반 나간 사람이 서있는것일까? 조심스럽게 문밖을 구멍을 통해 내다본다. 어~! 5층 아주머니시다.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지만 그 이상의 말은 섞은 적이 없다. 무슨 일이지 싶어 누구세요~라고 한마디를 내뱉는다. 벨소리 보다더 숨 넘어가게 아주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신다. 뭐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일단 문을 열고 보니 허리 구부정하게 일초를 다투는 사람마냥 들이닥치시면서 말문을 여신다. 난 그녀의 그 몇마디를 주워담기 바쁘다. 지시사항은 간단명료하다. 내 손에 쥐어주신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서 아저씨에게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하란다. 아이가 잡혀서 꽁꽁 묶여있다고... 하~
난 그녀의 지시사항을 간신히 반복 확인하고 그녀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질문이고 뭐고 먼저 다이얼을 돌린다. 그녀의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확신에 찬 오묘한 표정 때문일까 내 손마저 떨린다. 여러번 시도 끝에 아저씨에게 말씀을 전한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눌러줄 돌이라도 필요하듯 건조대에 걸린 빨래걸이를 접는다. 휴~
도저히 안되겠다. 아주머니의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인보에게 잠시 외출한다고 이야기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본다. 몇호인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아주머니가 대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나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내려온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니 그녀는 한쪽 손에는 핸드폰을 반대쪽 어깨로는 집전화를 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험증서를 들고 계신다. 정말 당황스럽고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갑자기 몽롱해진다. 꿈인가?

아주머니는 쭈구리고 앉아있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이지만 감히 웃을 수 없는 근엄함이 있다. 그녀의 눈에는 절망과 공포와 확신이 동시에 뒤엉켜서 함께 혹은 번갈아 아른거린다. 넋 놓고 꿈의 한 장면처럼 바라보기만 한다. 허나 내 머리속에서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정황 끼어맞추기에 여념없이 돌아가고 있다. 아주머니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핸드폰에 보험을 탈 수가 없다고 다급하게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의 전염성이 짙게 묻어있다. 내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녀는 협박을 받는 듯한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나에게 계속 쪽지에 글씨로 대화를 한다. 짧은 설명으로는 아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농구를 하다가 불량배들에게 머리를 맞고 끌려가서 어딘가에 묶어놓고 전화하는거란다. 아들과 통화했냐는 물음에 두번씩이나 아들과 통화했단다. 아들 맞단다. 그러면서도 계속 나에게 물어온다. 어떻게 하죠?

내 머리는 평소보다 느리게 걷고 있다. 너무 많은 정보를 그리고 어이없음을 함께 소화를 하다 보니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상황 파악을 위해 단편적인 질문들을 갈겨쓴다. 계속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강력하게는 못한다. 이미 그녀의 공포에 전염된 상태라. 어찌보면 나도 그녀의 아들이 잡혀있지 않다고 호언장담을 할 수가 없다. 시간은 흐르고 핸드폰 저너머 협박범은 계속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아주머니는 은행으로 달려간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파출소에 신고해달란다. 5분 남짓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아니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런데 뾰족하게 생각이 나기도 전에 이미 난 파출소의 문을 열고 있다.

난 최대한으로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침묵. 바로 그 고요함 속에 서 있는 내가 바보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은 하나도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출소 경관들이 몇가지 질문을 던진다. 난 최선을 다해 답해보지만 아는 것이 너무 적다. 하물며 납치되었다는 아들이 몇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 아주머니가 들어오신다. 휴~
난 어정쩡하게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은 그 납치되었다는 아들이 24살이라는. 경관 한분은 길게 듣지도 않고 바로 당하셨다며 보이스피싱이라고 한다. 아들과 통화를 했냐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분명히 아들 목소리였다고. 두번이나 바꿔줬다고 한다. 경관 아저씨왈 그런 순간에는 모든 목소리가 아들의 목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협박범의 전화를 끊지 못한 아주머니의 전화기를 확 끊어버린다. 전화온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없는 번호이다. 가짜인 것이다.
전화가 다시 울린다. 경관이 받자마자 욕을 퍼붓는다. 세상에... 희한한 욕을 아주 세트로 듣게 되었다. 경관이 전화를 끊더니 그쪽에서 웃더란다. 이미 아주머니가 처음에 입금한 400만원 인출했다고. 자기를 못 잡을거라고 비아냥 거리더란다.
그때 드디어 등장한 아저씨. 프랑스에 있는 아들과 통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상황 종료.

아주머니는 아까 아들의 생명에 위협이 있었던 상태와 동일하게 허겁지겁 파출소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신다. "아이고, 내 돈..." 하시면서.

난 이제 할일이 없어진 엑스트라. 이만 조용히 퇴장을 한다. 정말 한 여름도 아닌 한 봄의 꿈이라도 되는 것인가? 몽롱한 기운에 취해 꿈이라도 꾼 것일까?
아직도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다.

그래...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장담을 못하겠다.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얼굴... 그속에서 만난 것은 어떻게 황당한 그런 일에 당할 수가 있어가 아니고 나 역시 당할 수가 있을 바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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